역사 속 여성 과학자 노벨 과학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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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과학적 발견과 함께 한 여성과학자들
여성 리더십으로 ‘유리천장’을 깬 그녀가 있었다
최근 우리 과학기술계 안팎에서 여성과학자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고, 사회 전반적으로 성차별과 편견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여성 과학자들이 제 능력을 발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서구 선진국들에서도 여성과학자들이 차별과 홀대를 받거나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사례가 상당히 많았다. 이에 ‘역사 속의 여성 과학자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듯하다. 사실상 여성 과학자의 일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들이 전문가로서의 경력을 개발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감동을 받게 되며, 이를 지원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분위기도 포착할 수 있다.
여성 과학자의 대명사, 마리 퀴리
위의 사진은 1927년에 개최된 제5차 솔베이 회의 때 찍은 것이다. 이 사진에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현대 물리학을 만들었던 29명의 기라성같은 과학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중 17명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라는 점에서 이사진은 상당한 주목을 받아왔다. 한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의 아이큐(IQ)를 합치면 그 값이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런데 이 사진은 다른 각도에서도 볼 수도 있다. 29명의 과학자중에서 여성은 마리퀴리가 유일한 것이다. 그동안의 과학이 남성 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점은 이 사진 한 장으로도 명확히 드러나는 셈이다.
마리 퀴리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여성 과학자는 아마도 마리 퀴리가 유일할 것이다. 마리 퀴리는 역사상 최초로 노벨상을 두번씩이나 받은 위대한 인물이다. 그녀는 방사능 연구를 통해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하여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고, 1911년에는 금속 라듐을 순수하게 추출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마리 퀴리는 1911년에 과학아카데미에 입후보했지만 고배를 마셨으며, 그 이후로는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여성 과학자는 동그란 네모?
마리 퀴리도 차별을 받았지만, 그 이전의 여성 과학자들의 경우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과학의 역사에는 여성 과학자가 차별을 받았던 사례가 수두룩하다. 18세기만 해도 여성과 과학자는 ‘동그란 네모’와 같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용어였다. 마리아 빙켈만은 베를린 과학아카데미에서 남편의 조수로 일해야 했으며,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의 조수가 되어야 했다. 라우라 바시는 여성 과학자로는 역사상 최초로 대학 교수가 되었지만, 볼로냐 대학 이바시에게 기대한 역할은 박식한 과학자가 아니라 행사가 열릴 때 관객을 끌기 위한 얼굴마담이었다. 소피 제르맹은 에꼴 폴리테크닉의 수업을 청강하면서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르블랑이란 가명을 사용해야만 했다. 이러한 사정은 여성에게 과학교육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조금씩 개선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과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여성들도 속속 등장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에도 과학을 공부하는 여자 대학생은 희귀한 존재였고, 과학을 연구하는 여성은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홍일점인 경우가 많았다. 늦은 감이 있지만, 선진국의 주요 과학단체들이 여성을 회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오래전일이 아니다. 미국의 국립과학아카데미는 1925년, 영국의 왕립학회는 1945년,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는 1979년에 여성회원을 처음으로 선출했다.
이처럼 여성 과학자들에 대한 문호는 서서히 개방되었지만, 그녀들이 경력을 개발하고 인정을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심지어 노벨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한데도 수상의 영예를 누리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리제 마이트너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그 대표적인 예다. 마이트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로 아인슈타인이 ‘우리들의 마리 퀴리’로 칭송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핵분열 현상의 발견과 설명에 크게 기여했지만, 1944년 노벨 화학상은 그녀의 공동연구자인 오토 한에게만 돌아갔다. 영국의 화학자인 프랭클린은 DNA 이중나선 구조의 근거가 되는 X선 회절 사진을 찍었지만, 안타깝게도 37세의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1962년 노벨 생리학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 과학상을 받은 20세기 여성 과학자
마리퀴리 이외에도 20세기에 노벨 과학상을 받은 여성은 9명이 더 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는 마리아 마이어가 있고,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는 이렌 퀴리와 도로시 호지킨이 있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6명으로 가장 많은데, 여기에는 거티 코리, 로잘린 얠로, 바바라 맥클린톡, 리타 레비몬탈치니, 거트루드 엘리언, 크리스티안네 뉘슬라인폴하르트가 포함된다. 20세기를 통틀어 10명의 여성 과학자들이 11개의 노벨 과학상을 받았던 셈이다. 노벨 생리의학상에 비해 화학상이나 물리학상 수상자가 적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56~1958년의 미국 과학자사회를 분석한 한 연구는 과학의 분야에 따라 여성의 비율과 문화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당시에 심리학과 교육학을 포함한 과학 전체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6.25%였으며, 이때, 과학을 주변적 분야, 한계적 분야, 참여적 분야로 구분할 때, 주변적 분야는 여성의 비율이 5% 미만인 분야로서 물리학, 지질학, 공학, 농학 등이 여기에 속했다. 한계적 분야는 여성의 비율이 5~15%로서 생물학, 수학, 지리학, 천문학 등을 포함했으며, 여성의 비율이 15~40%인 참여적 분야에는 심리학, 교육학, 영양학 등이 있었다. 주변적 분야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배제하는 문화가 발달했으며, 한계적 분야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분리하는 문화가 형성되었고, 참여적 분야에서는 여성의 리더십이 발휘되긴 하지만 여성에 의한 과학의 질적 저하를 염려하는 이중적 자세가 나타났다. 조금 오래된 조사이긴 하지만 곱씹어 볼만한 사항이 많아 보인다.
100년 10명에서 18년 8명으로
21세기에 들어서는 노벨 과학상을 수상하는 여성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2000년대에는 5명의 여성이 노벨 과학상의 대열에 합류했다. 린다 벅은 냄새 수용체와 후각시스템의 구조에 관한 연구로 200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으며, 프랑 수아 바레 시누시는 AIDS를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발견한 공로로 20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흥미롭게도 2009년에는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여성이 3명이나 배출되었다. 아다 요나스는 리보솜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엘리자베스 블랙번과 캐럴 그라이더는 텔로미어와 텔로머라제 효소의 염색체 보호 메커니즘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2010년대에는 여성 과학자의 노벨상 수상이 주춤하는 듯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중국의 여성 과학자인 투유유밖에 없었다. 그녀는 개똥쑥에서 말라리아 특효약을 개발한 공로로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다행히 올해(2018년)에는 여성 과학자 2명이 노벨 과학상을 수상했다. 도나 스트릭랜드가 레이저 물리학 분야를 개척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프랜시스 아널드는 효소의 유도 진화에 관한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노벨물리학상의 경우에는 1903년과 1963년에 이어 55년 만에 여성 수상자가 탄생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여성 과학자를 보는 관점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노벨 과학상을 받은 여성은 모두 18명이다. 노벨 과학상 전체 수상자가 607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3%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에 분노하거나 자책할 필요는 없다. 다른 각도에 서 보면 20세기 100년을 통틀어 노벨상을 수상한 여성 과학자는 10명이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는 18년 동안 8명이나 배출되지 않았는가? 앞으로는 여성 과학자들 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사례가 더욱 많아질 것임에 틀림없다.
여성 과학자의 일생에 주목하는 이유
과학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편견이나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군의 과학 사회학자들은 과학활동이 특정한 집단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 설명하는 개념에는 마태 효과, 후광 효과, 마틸다 효과가 있다. 마태 효과는 경력 형성에 성공한 과학자일수록 인정과 자원획득에서 유리하다는 점을 뜻하고, 후광 효과는 우수한 과학기관에 속한 과학자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많은 이익을 얻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마틸다 효과는 여성이 적절한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결과적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경향을 지칭한다. 역사 속 여성 과학자를 살펴보면 여성에 대한 각종 차별과 여성에게 불리한 제도나 문화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서는곤란하다. 과학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여성 과학자가 각종 차별과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훌륭한 인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성 과학자들의 열정을 이해하고 성심껏 도와준 몇몇 남성들이 존재했다는 점도 발견할 수 있다. 사실상 여성 과학자의 일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들이 전문가로서의 경력을 개발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감동을 받게 되며, 이를 지원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분위기도 포착할 수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여성 과학자들에 대한 전기나 평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내친 김에 나의 역할모델(role model)이 될만한 여성 과학자를 찾아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겠는가?
송성수 교수님은 서울대학교 무기재 료공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산업기술평가원 (ITEP) 연구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STEPI) 부연구위원, 부산대학교 교양 교육원 교수를 거쳤다. 현재 부산대학교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부산대 대학원의 과학기술 인문학 협동과정과 기술사업정책 전공에도 관여하고 있다. 2018년 현재 한국과학기술학회 회장과 부산대학교 교양교육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나는 과학자의 길을 갈 테야』『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인다, 철강』『과학기술과 문화가 만날 때』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