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능력일까, 과학일까 : 스파이더맨의 거미줄과 신소재 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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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힘에서 과학의 힘으로… 히어로 영화 속 무기
판타지를 넘어, 우리 삶 바꾸는 실마리 제공
히어로 영화 속에서 스파이더맨은 늘 독창적인 능력으로 주목받아 왔다. 벽을 타고 오르거나 뛰어난 반사 신경을 발휘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지만, 그가 가진 가장 대표적인 무기는 단연 ‘거미줄’이다. 영화 속에서 거대한 열차를 붙잡으려 애쓰는 장면은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다면 이 거미줄은 단순한 초능력의 산물일까, 아니면 과학적으로 구현 가능한 소재일까.
스파이더맨의 원작만화를 살펴보면, 주인공 피터파커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직접 거미줄 용액과 발사장치를 제작해 사용한다. 손목에 착용한 장치에 카트리지를 삽입하고, 버튼을 눌러 거미줄을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실제 거미가 거미줄을 방사하는 원리와 유사한데, 원작에서의 거미줄도 초능력이 아닌 과학적 발명품으로 설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자연 거미줄의 놀라운 성질과
슈퍼 섬유 모색
현실의 거미줄은 언뜻 보기에는 가볍고 약해 보인다. 그러나 같은 두께의 강철보다 인장 강도가 약 다섯 배 이상 높다. 여기에 더해 비중이 낮고 탄성이 뛰어나, 방탄복이나 인공 인대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우수한 물성을 거미가 단순히 곤충을 먹고 물만 섭취하면서도 합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온·고압·강산·강염기 등 해로운 조건 속에서 합성섬유를 생산하는 현대 공정과 대조적이다.
이런 거미줄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거미줄을 대량으로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거미줄을 테이크아웃 컵 한잔 정도 모으려면 약 2만 7,000마리가 필요하다. 닭이나 소처럼 양식을 하고 싶지만 거미는 집단으로 사육할 경우 서로를 잡아먹는 습성이 있어 양식화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연 상태의 거미줄을 대량으로 수집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결국 과학자들은 인공적으로 거미줄 단백질을 합성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유전공학자들은 거미줄 단백질의 유전자 구조를 해독하고, 이를 염소에 주입하여 젖에서 거미줄 단백질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생산된 물질은 ‘바이오스틸(BioSteel)’이라 불렸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실제 거미줄만큼 강도와 인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생산 비용 또한 지나치게 높았다. 결국 바이오스틸은 상용화의 벽을 넘지 못하였다.
다음으로 연구자들은 거미의 방사기관을 정밀하게 관찰한 끝에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거미줄은 굵은 한 가닥이 아니라, 수십 가닥의 가는 섬유가 합쳐져 형성된 구조였다. 이러한 다중 섬유 구조가 높은 인장 강도와 인성을 동시에 실현하는 비밀이었다.
더 가는섬유를 만들고자 하는 과학자들의 노력은 끝을 몰랐다. 섬유를 만드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솜사탕처럼 고온에서 녹여서 불어내는 용융방사(melt blowing), 자장면 같이 밀가루 반죽을 늘이듯 하는 연신 공정 등 일상에서도 친근한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간단하게 나노섬유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전기방사(electrospinning)이다. 전기방사는 높은 전압을 통해 플라스틱 용액을 폭발시켜 뽑아내는 공정이다. 전기방사를 통해 제작된 섬유는 머리카락 굵기의 약 천분의 일 수준인 100나노미터까지 줄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섬유의 표면적이 극적으로 커지고, 새로운 물성을 발현하게 된다. 이런 나노섬유는 미세한 불순물을 잡아낼 수 있는 필터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이 가능하다.
상상에서 출발한 아이디어, 첨단소재 연구와 긴밀
현실적으로 거미줄을 이용해 집이나 차를 만들 수는 없지만, 가장 유사한 슈퍼섬유로는 탄소섬유를 들 수 있다. 탄소섬유는 강철보다 최대 열 배 강하면서도 (인장강도) 밀도는 4분의 1에 불과하다(비강도). 이러한 특성 덕분에 항공우주, 자동차, 스포츠 장비 등 다양한 산업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탄소섬유의 제조는 복잡한 공정을 필요로 하지만, 그 성능은 기존의 금속 소재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하다. 따라서 탄소섬유는 ‘가볍고 강한 소재’의 대명사로 불리며, 우주엘리베이터 케이블과 같은 미래 기술을 가능하게 할 잠재적 소재로도 주목받는다.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은 겉으로는 초능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첨단 소재 연구와 긴밀히 맞닿아 있다. 상상력에서 출발한 아이디어가 과학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실험과 연구를 통해 현실의 신소재 공학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과학의 본질이자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소재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좌우해 왔다. 돌도끼 시대를 끝낸 것은 청동이었고, 청동기를 넘어선 것은 철기였다. 『아기돼지 삼형제』의 교훈 또한 결국 위기를 이겨낸 힘은 ‘소재’였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만약 벽돌보다 더 강력한 늑대가 등장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에 맞설 새로운 소재를 준비해야 한다.
히어로 영화 속 장면은 단순한 판타지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바꾸는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자연의 원리를 모방해 더 나은 소재와 기술을 개발하는 이러한 시도는 미래 사회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가운데 누군가는 과학자가 되어 우리를 새로운 시대, 나아가 우주로 이끌어 줄 것을 기대한다.
이민욱 책임연구원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복합소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 한국복합재료학회와 대한기계학회 이사이며, 한국과학창의재단의 과학기술 진로컨설턴트이자 과학융합강연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가볍고 단단한 복합재료를 활용한 경찰장비 개발을 통해 방패와 조끼 등 경찰을 보호할 수 있는 장비 개선에 기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