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CE EDUCATION ISSUE

생물물리학으로 알아보는 융합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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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할 수 있고, 아는 만큼 보인다!
다양한 분야의 협력으로 확장되는 시야


수학, 물리학, 생물학 등 다양한 과학 분야는 각기 독립된 연구 방법과 영역을 형성하고 고도화·세분화되어 왔다. 이렇듯 우리가 중등교육 또는 대학교육에서 접하는 과학은 분야별 전문성을 강조하고 있고, 학생들은 각기 다른 과학 분야 사이에 서로 교류할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중에서도 물리와 생물 사이의 벽은 특히 견고해서,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생물학을, 생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물리학을 서로 기피 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마치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그리핀도르 기숙사의 학생이 슬리데린 기숙사를 방문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될 금기로 느껴지는 것처럼.


한 분야를 넘어서
다양한 과학의 협력, 융합과학


전문화되어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인류를 다음 단계로 이끌어 왔지만, 어떤 사회적·기술적 문제들은 한 분야의 깊은 지식만으로 해결하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런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문 간 협력이 요구되며, 이를 융합과학(융합학문), 학제 간 연구 등으로 부른다. 융합과학 분야는 매우 다양하지만, 생명과학, 정보과학, 수학이 다른 분야에 적용된 경우들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이 중 생명과학과 다른 분야의 융합을 예로 들면, 통계학을 활용하여 유전체와 단백질 데이터 분석을 한다든지, 의생명과학이 이미징 기술이 융합되어 의료 영상 기구를 개발하고 분석한다든지, 기계공학과의 협업으로 웨어러블 디바이스나 바이오센서 등을 제작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생명과학 분야 외에도 AI기술이 다방면에 활용되는 것이나 재료 분야에서 물리학과 화학의 융합, 지구·환경 분야에 다양한 학문이 공헌하는 것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물리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였을 때, 나는 특별히 융합과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초에는 융합과학과 같은 새로운 길, 고난스러운 순교자의 길을 개척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전통적이고 성공적인 분야인 고체 물리를 전공할 계획이었다. 내가 생물 물리 연구실에 가장 먼저 찾아가 지도교수가 되어주시기를 청하였던 것은, 교수님께서 최근 수년간 특출나게 훌륭한 연구성과를 내고 계셨었기 때문에 나도 그런 좋은 논문들을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생물 물리 연구실로 얄팍하게 급선회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합학문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컸다. 물리학 전공자가 생물을 연구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이러한 심리적 장벽을 이미 잘 알고 계셨던 교수님 연구실 방문에는 다음과 같은 쪽지가 붙여져 있었다.


‘아. 생물학도 잘 알고 물리학도 잘 아는 매우 특별한 학생들만 할 수 있는 연구는 아니구나’ 하는 용기를 얻었다. 다행히도 운과 때가 맞아 첫 방문에 교수님의 제자로 받아주시기도 했고.


물리 현상을 생명과학에 적용하자…

융합과학으로 밝혀진 새로운 기술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사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테크닉은 단분자 형광공명에너지 전이(single molecule fluorescence energy transfer)라는 것으로 독일의 물리화학자 Theodor Förster가 발견한 현상(그림 1) 에 기반한다. 두 개의 형광 분자 사이에서 에너지 전이가 일어나며, 이 에너지 전이 효율이 두 분자 사이의 거리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파랑색 광자를 흡수하여 초록색 광자를 방출하는 D라는 형광 분자가 있고, 초록색 광자를 흡수하여 빨강색 광자를 방출하는 A라는 형광 분자가 있다고 하자.(그림 1-A)D 분자에 파랑색 빛을 쏘면 이를 흡수하여 들뜬 상태가 되었다가 초록색 광자를 방출해야 하지만, A 분자가 D 분자와 매우 가까이(<10 nm) 있다면 원래는 방출되어야 할 초록색 광자 중 일부를 A 분자가 흡수하여 A 분자의 들뜬 상태를 유도하고 결국 빨강색 광자를 내뱉게 된다는 것이다. 원래 방출되어야 할 초록색 빛의 세기와 위와 같은 형광 에너지 전이에 의해 방출된 빨강색 빛의 세기의 비율을 FRET 효율이라고 하며, FRET 효율은 두 형광 분자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줄어든다.(그림1-B )


이 물리화학적 현상이 생명과학 연구에 굉장히 유용하다. 생명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 중 하나는 다양한 프로틴이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는 DNA 또는 RNA과 상호작용하여 그 정보를 활용하거나 DNA를 복제·수복하는 활동인데, 이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DNA(염기쌍 하나 당 0.34 nm)와 프로틴(수십 nm)의 크기를 고려하면 생명현상에서 중요한 길이의 단위는 나노미터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광학현미경은 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분해능이 수백 nm로 제한되어 있어서 생명현상 중 동적인 부분을 광학현미경으로 관찰하기 힘든 반면, 길이 측정의 범위가 나노미터 스케일인 FRET 현상을 활용하면 실시간 측정이 가능해진다. 예컨대 PcrA라는 이중나선 풀림효소가 DNA와 상호작용하는 것을 관찰해 보자 (그림2). PcrA에는 앞에서 말한 초록색 형광 분자를 “붙였고(뒤에서 설명하겠다)”, DNA의 끝자락에는 빨강색 형광 분자를 붙였다. 이때 관찰되는 실시간 FRET 효율의 그래프를 보면, (그림2-A) 에서는 서서히 증가하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반복되지만 (그림2-B) 에서는 변화가 없다.


두 가지 사실을 종합해보면, PcrA가 빨강색 형광 분자 옆에 가만히 머물고 있어서 (즉, 상대적 거리가 변하지 않아서) 그림 2B에서는 FRET 효율이 일정한 반면, 그림 2A에서는 빨강색 형광분자가 점점 가까이 오다가 갑자기 멀어지는 것이다. 즉,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단일가닥 DNA로, PcrA에 의해서 낚시줄이 감기듯 딸려오다가 끝까지 도달하면 풀려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이는 PcrA라는 효소가 DNA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관찰한 것이다.


약 40개의 염기를 낚시줄처럼 감아 들이는데 약 0.5 ~ 1초의 시간이 걸리는 빠르기다. 이처럼 물리에서 다뤄지는 현상을 생명과학에 적용하였더니 광학현미경의 분해능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은 세계의 동역학을 실시간으로 엿볼 수가 있게 되었다. 생물학자들이 고도의 추리력으로 밝혀낸 많은 생명현상들을 이제는 백문이 불여일견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융합과학은 다양한 분야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는 반면, 융합을 통해 태어난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면 상대적으로 손쉽게 많은 발견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실험이 가능하려면 우선 생물학 실험실에서 필수적인 실험 기법들을 배워야 한다. 물리학 실험과 달리 생물학에서는 살아있는 것들을 다루기 때문에 상온에 오래도록 방치할 수 없고, 생명현상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필요한 이온과 ATP등의 연료를 포함한 완충액을 준비하여 실험하여야 한다. 이때 니트릴 장갑으로 오염을 방지하고 기계식 피펫으로 마이크로리터 단위의 정확한 용량을 계량하는 것도 필요하다. 앞서 초록색 형광 분자를 PcrA에 붙인다고 표현했는데, 여기선 화학이 활약한다. (그림2)의 실험에는 Cy3라는 형광 분자(그림3-A)가 사용되었는데, 이 Cy3를 프로틴에 붙이는 방법을 간략히 알아보자.(DNA에 붙인 빨강색 형광 분자는 Cy5이다)


우선 Cy3에 말레마이드가 추가된 분자를 합성하고 (그림3-A, 이는 상용으로 구입할 수 있다) 프로틴이 시스테인(아미노산 중 하나이다)을 포함하고 있다면 시스테인의 티올기(-SH,그림3-B )와 말레마이드를 반응시켜 시스테인에 Cy3를 결합시킬 수 있다. 이렇게 Cy3가 결합된 프로틴을 크로마토그래피를 통해 정제하여, (그림2)의 실험에 활용하는 것이다. FRET 현상을 생명분자에 적용한다는 것이 개념적으로야 아주 단순한 일이지만 이를 실험적으로 실현하는 것에는 이렇게 다양한 지식과 기능을 요하는 준비 단계들이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Cy3가 결합된 프로틴과 Cy5가 결합된 DNA를 제작하였다 해도, FRET 효율을 관찰할 실험장치가 필요하다. 여기선 분광학(물리학으로도 화학으로도 볼 수 있겠다)이 필요하다. (그림4)에서는 FRET 효율을 측정하는 실험장치의 구성도를 살펴보자. 사실 Cy3는 (그림1)에서와 같이 파랑색 빛으로 들뜨게 하지 않고 (Cy3가 아니라 2008년 노벨 화학상의 영예를 얻은 초록 형광 프로틴(GFP: green fluorescent protein)이 파랑색 빛으로 들뜨는 분자이다.) 보통 530 nm정도의 연두색 빛으로 들뜨게 하면 540 ~ 640 nm에 이르는 주황색 빛을 방출한다.


실험장치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연두색 레이저로 Cy3를 들뜨게 하면, 이내 Cy3에서 주황색 형광이 방출되고, 이 빛을 현미경을 이용하여 EMCCD(높은 민감도를 가진 전자 증폭형 CCD이다) 카메라로 보내어 촬영하는 것이다. 이때 광학에서 말하는 전반사(TIR: total internal reflection)를 사용한다. 그 이유는 연두색 레이저로 오직 Cy3만을 들뜨게 하고 싶지만 용액 속의 다른 불순물이나, 현미경 슬라이드의 유리 등에서 형광이 나오기 때문에, 용액 전체를 밝히지 않고 형광 분자들이 위치한 표면 근처에서만 최대한 얇게 밝히기 위해서이다. 주황색 빛에는 Cy3에서 원래 나와야 할 광자와 형광공명에너지전이로 Cy5에 전달되어 방출된 광자가 섞여 있으므로 이를 짧은 파장의 광자는 반사하고 긴 파장의 광자는 투과시키는 이색성 거울(DM: dichroic mirror)을 이용하여 분리한다. 두 신호를 따로 촬영하면 (그림2)에서와 같이 초록색과 빨강색 신호를 동시에 측정할 수 있다.


이 정도로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사실은 데이터에서 더 많은 것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림2)의 반복된 패턴에서 최저점에서 점점 상승하다가 다시 최저점으로 떨어지는 소요시간의 분포(그림2-C)를 그려보면 약 0.2 ~ 1.0 초 사이에서 분포하는데 이것은 PcrA 프로틴이 총 40개의 염기를 감아 들이는데 걸린 시간이다. 이 과정이 몇 개의 단계로 구성된 과정인지를 gamma-distribution으로 분석(그림2-D)해 보면 최소 25개 또는 35개 이상의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PcrA 효소가 한 번에 한 개의 염기를 감는다는 것을 밝혀낼 수도 있다. 정말 아는 만큼 할 수 있고,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은 이렇듯 멋진 일이다.


다양한 학문의 융합,
더 ‘쉽게’ 더 ‘탁월한’ 해결책 제시


융합과학의 발전을 복잡한 전체를 작은 구성 요소들로 나누어 각각을 분석하려는 사고에 대한 대척점으로서의 전체주의적 사고 혹은 통섭적 방법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고, 보편과학을 추구했던 라이프니츠의 계보를 따르는 학문적 움직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필요에 의한 발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떤 문제들은 전통적인 과학의 분류 중 하나를 골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다양한 학문을 섞어 씀으로써 훨씬 더 쉽게 또는 더 탁월하게 해결할 수 있다.


그러한 경우, 기존의 방법론에 얽매이기보다 문제에 맞추어 유연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예컨대 2000년대 미국이 나노·재료·화학·생물 등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를 국가 어젠다로 채택하여 문제 해결을 유도한 것이나, 2010년대에도 MIT를 주축으로 하여 의생명 컨버전스가 확산된 바 있다. 오직 하나의 예일 뿐이지만 그림 2의 실험이 그렇다. 광학 현미경의 분해능 한계로 관찰할 수 없는 이중가닥 풀림 효소의 실시간 동역학을 관찰하고 싶다는 필요가 있었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학문은 물리학도, 생물학도, 화학도, 컴퓨터과학도, 수학도 아니었다. 모든 분야의 지식이 골고루 적당히 사용되었다.


정리하면, 나는 어떤 학문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분야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는 의식을 좀 덜어낼 필요가 있다. 나는 무슨 전공이니까 다른 것은 못한다,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면 좋을 것 같다(다만 다른 분야에 대한 존중과 겸손함의 미덕은 꼭 갖추어야 하겠다). 특히 교육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학생들에게 굳이 한계와 영역을 설정해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물리학 전공이니까 이건 안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도록 교육해야 하지 않을까.


관심 있는 문제가 생기면 이것을 풀기 위해 뭐든 배우고 무엇이든 해보겠다는 열려 있는 마음과 유연한 사고가 융합과학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너무나 다양한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아서 불안할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을 혼자 다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생물학 전공자들은 분광학 실험장치나 통계적 분석은 다른 동료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고, 물리학 전공자들은 생화학 반응 및 정제는 또 다른 동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조금 덜 무서워하고 더 도전해 보면 좋겠다. 그런 환경에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한계가 극복된다. 2014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초분해능 광학현미경처럼.


이경석 교수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후, UIUC 생물물리학 박사, Harvard 대학 연구원을 거쳐 현재 국립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물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물리학회과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20년간 생물과 물리학, 물리교육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