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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시대의 과학교육 방향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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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과학자의 앎과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

인공지능과 코로나 시대의 과학교육의 핵심‘창의성’


지난해부터 코로나19가 유행하며 과학과기술이 가장 앞섰다는 나라들도 처참한 상황에 놓였고,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대부분 학교에서 정상적인 등교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수업이 인터넷으로 진행되며 비대면 교육의 한계와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러한 비대면 속의 문제는 인공지능이 먼저 가져 왔다. 사람 대신에 기계를 상대하는 무인화 접대와 얼굴을 직접 맞대지 않고 이루어지는 비접촉 거래가 코로나19 사태 전에도 이미 빠르게 늘어났지만 구성원 사이에 ‘물리적 접촉’ 없이는 직접 적인 소통을 통한 협력과 상호참여가 이루어지기 어렵고, 결국 사회의 안정성과 새로운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코로나19는 언젠가 끝나겠지만 비슷한 상황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크며, 인공지능은 끊임없이 발전하여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줄 것이기에, 미래를 위하여 바람직한 과학교육의 방향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쟁점들은 대부분 과학 및 기술과 관련되어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과학과 관련된 핵심적인 쟁점으로 인공지능, 그리고 지난해부터는 코로나(바이러스 질환)19를 들 수 있다. 코로나19는 지금도 계속해서 온 누리에 퍼져나가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가장 앞섰다는 나라들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처참한 상황에 놓였고, 최근 백신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대부분 학교에서 정상적인 등교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수업이 인터넷으로 진행되면서 비대면 교육의 한계와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비대면 문제는 인공지능이 먼저 가져 왔다. 이른바 초연결사회 개념은 구성원 사이의 상호작용, 곧 소통을 강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물 인터넷 (IoT ; the Internet of Thing)이란 용어에서 드러나듯이 인간과 인간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 그리고 사물과 인간의 연결을 뜻한다. 이에 따라 사람 대신에 기계를 상대하는 무인화 접대와 얼굴을 직접 맞대지 않고 이루어지는 비접촉 거래가 코로나19 사태 전에도 이미 빠르게 늘어났다.


비대면 교육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러한 간접적 연결은 유대감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인간관계의 단절을 심화시킬 것으로 우려된다. 구성원 사이에 ‘물리적 접촉’ 없이는 직접적인 소통을 통한 협력과 상호참여가 이루어지기 어렵고, 결국 사회의 안정성과 새로운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코로나19는 언젠가 끝나겠지만 비슷한 상황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크며, 인공지능은 계속해서 발전해 나갈 터이니 이 두 가지는 현재뿐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줄 것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교훈을 얻고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하여 바람직한 과학교육의 방향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의 시대, 과학자의 창의성 재조명 먼저 인공지능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람의 지능, 곧 자연지능은 기계적인 연산에서는 인공지능을 당할 수 없다. 알파고에서 보듯이 바둑에서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 인공지능에 뒤떨어지게 되었고, 당연하게도 이러한 추세는 점점 심해질 것이다.


인공지능은 물질적 풍요와 경제적 이윤이라는 도구적 합리성이라는 속성을 지닌 기술을 사람과 닮은 기계로까지 극단적으 로 끌어 올린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기계는 환원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두뇌는 복잡계이고 그 지능은 복잡계의 떠오름(emergence)현상이다. 이러한 지능을 지닌 두뇌를 환원주의에 입각한 기계처럼 간주하는 것은 위험성을 지니며, 이는 인공지능을 지닌 기계에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몸의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기술에 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자동차는 다리의 편리함이라는 순기능을 주지만 역기능으로 운동 부족에 따른 몸의 기능 저하와 더불어 대사성 질환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능형 기계인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머리(두뇌)의 편리함에 따른 역기능은 무엇일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고능력의 저하를 들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고력과 판단력을 인공지능에게 내어주고 사람이 도리어 ‘기계’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인공지능의 기반을 소유한 극소수 자본가와 소수의 개발자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는 땜빵노동자(precariat)로서 기계의 부품처럼 기능하는 세계, 이른바 디스토피아가 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는데, 요즘 유행하는 ‘코딩’ 교육은 땜빵노동자를 양산하는데에 기여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기계가 사람처럼 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람이 기계처럼 되는 것을 우려해야 할 상황이다. 우리의 인식이 기계처럼 작동하게 되면, 깊은 사유를 불가능하게 하고 존재의 소외를 가져올 위험이 크며, 나아가 삶의 질을 낮추고 인간성의 파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도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사람만의 독보적 능력인 창의성의 구현이 필요 하며, 이는 특히 창의성의 발현을 전제하는 과학의 바람직한 교육이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그런데 과학의 힘은 구체적 지식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에 있다. 과학적 사고는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가리키는데, 아직 모르는 영역에서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어떠한 현상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그릇된 앎-사실은 앎이 아님-을 지니고 있다는 뜻인데, 이는 아주 위험할 수 있다. 실제로 대학에서 교육해보면 물리학을 잘못 배운 학생보다는 차라리 아예 배운 적이 없는 학생이 궁극적으로 학업 성취도가 높은 경우가 많다. 앎이란 결국 아는 것은 안다는 사실과 모르는 것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며, 과학교육에서는 과학적 사고와 더불어 앎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태도를 길러줄 필요가 있다.


과학과 현대사회의 발전에는 과학적 사고와 함께 자유로운 상상력이 중요하다. 상상력을 통해서 과학이 발전하는 것이고,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 창의성의 발휘도 가능해진다. 이른바 메타적 관점에서 배움의 내 용을 넘어서 배우는 일 자체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지며, 나아가 객체로서의 자신을 주체로서의 자신이 바라보는 경지도 생각할 수 있다. 에셔(M.C. Escher)의 작품인 그림에 멋지게 형상화되어있는 이러한 관점은 상상과 상식, 그리고 주관과 객관을 잇는 작업으로 인문학과 예술뿐 아니라 과학 활동과 맞닿아 있으며, 실제로 과학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올바른 질문은 바로 메타적 관점을 통해서 얻어진다. 창의성으로 구축한 이론은 아름다움에 관한 미학적 요소가 중요하고, 이러한 점에서 과학자는 예술적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다.


과학자가 일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과학을 통해서 통일된 총체성을 새롭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 아름다운 어울림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푸앙카레(H. Poincare)의 언명은 널리 알려져 있다. 사실 과학적 질문과 조사는 미학적 성격이 짙으며, 아름다움이란 단지 주관적인 의견이 아니라 질서와 변화, 그리고 어울리는 총체성의 통찰 과정에서 수반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창의성을 높여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소양을 기르고, 또한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려면 과학을 포함하여 인문학과 예술, 사회와 삶에 대해 폭 넓은 공부가 필요하다. 특히 과학교육의 핵심은 전공과 무관하게 과학의 의미와 정신을 어떻게 잘 이해시키는가에 있다. 창의성을 지향하는 과학적 사고와 진정한 과학 정신을 위해서는 조각내기를 극복해서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전체를 성찰하는 자세의 교육이 중요하며, 인간이 과학 탐구의 대상이자 과학 활동의 주체임을 생각하면 인문학까지 포함해서 메타적인 수준에서 인간을 고찰하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에 맞추어 과학의 본질과 사명, 의미, 그리고 문화로서의 과학을 강조하는 과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며, 아울러 앎과 삶에 대해 인문학, 그리고 사회과학과 함께 깊이 있게 고찰하면서 소통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야 한다.


과학교육, 진학과 취업 위한 단계로 전락하다

교육의 목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홍익인 간의 구현인데 이는 사회와 자연의 구성원으로서 우리 몸과 마음을 포함한 삶의 질을 높이고 함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려는 과학의 목적과 일치하며, 따라서 과학교육도 당연히 이를 지향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과학교육이 그리 바람직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모든 교육이 그렇듯이 과학교육도 대학 입학과 취업을 위한 방편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단편적인 과학 지식의 암기와 더불어 틀에 박힌 문제의 기계적 풀이에 매달려서 새로움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훈련을 받고 있다. 학생의 흥미를 끌기 위한 이른바 재미있는 이야기하기(story telling) 방식도 과학적 사고를 길러주기 어렵고, 특 히 과도한 시청각 자료를 이용한 이야기 형식의 강의는 추상 능력을 약하게하고 창의성을 억제할 위험성이 있다. 획일적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노력은 대체로 형식 연산과 더불어 환원적 사고를 지향하게 되므로 이러한 교육은 과학의 본질과 관련이 없음은 물론이고, 개인의 잠재적 능력을 억압해서 과학적 사고를 기르기는커녕 창의성을 오히려 저해한다. 더욱이 과학을 도구로 여겨서 형식 연산에만 치중하게 되면 이를 필연적 질서로 인식해서 실재와 유리된 지나친 일반화의 위험성을 깨닫지 못하고 분석적 환원주의 입장에서 이론의 공식화와 기계적 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주의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결국 이러한 교육은 학생들을 열등생과 우등생으로 가르고, 각각 열등의식과 우월의식을 심어서 결국 서열체제의 순응과 독단적 지배를 조장하게 될 것이며, 새로운 시각을 가지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발전을 억제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문명의 몰락을 재촉할 위험성이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드러난다. 코로나19는 확산을 막으려는 필사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지역이나 국가에 국한되기는 커녕 정치 체제나 경제 규모를 가리지 않고 온 세계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이러한 현상은 지구에 있는 우리는 서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도구적 지식으로서 과학과 기술을 활용한 현대 문명이 얼마나 취약한지 증언한다. 박쥐에서 유래했다는, 곧 ‘자연’에서 출현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의 모든 영역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이러한 현실은 환원주의 관점의 조각난 사고로는 온전하게 이해하고 극복할 수 없다. 특히 독자적으로 물질대사를 하지 못해서 숙주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바이러스는 환경의 중요성과 함께 이를 포함한 ‘온생명’ 개념의 타당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자연과 사회, 인간이 서로 얽혀 있는 ‘온생명’과 ‘온문화’에 대한 통합적 사고의 필요성을 다시금 일깨우게 된다. 이에 따라 조각난 교과목들을 별개로 다루는 환원주의에서 벗어나 각 교과목 영역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조각들을 다시 결합해서 온전한 총체성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조각을 모으려는 시도는 형식 연산으로 나타낼 수 없으며 바로 창의성의 본보기임은 과학, 특히 물리학의 발전 과정이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교과목 사이의 벽을 허물고 물질과 생명, 사회, 그리고 인문예술을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눈과 생각을 기르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인문학적 성찰 담은 과학교육 절실

현대는 과학기술의 시대라 널리 일컬어지며, 반면 인문학은 몰락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술, 곧 실용학문의 시대로서 인문학과 과학을 포함하는 기초학문의 몰락이 현대사회의 정확한 진단이다. 심하게 말하면 기술 중독의 시대로서 기술에 대한 두려움과 숭배를 담아서 진짜와 가짜를 혼동하며, 폭력에 익숙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전자오락에 탐닉하면서 실제 참혹한 전쟁의 비참함을 느끼기는 커녕 무감각해지고 심지어 그 중계를 즐기게 된다. 요새 끔찍한 폭행과 성범죄, 학대와 살해 등 충격적인 범죄가 자주 보도되는데 사회적으로 약자인 젊은이가 가해자이면서 그보다 더 약자인 노인이나 어린아이, 여성이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이는 앞서 지적했듯이 비판적인 과학적 사고를 억제하고 체제 순응을 조장하는 교육에 기술 중독이 더해진 현실의 필연적 결과가 아닐까 우려하게 된다. 이러한 파멸적 상황을 막기 위해서도 앞서 지적한 과학의 목적에 충실하게 인문학적 성찰을 담은 과학교육이 필요하다. 먼저 과학적 사고를 제대로 길러주려면 과학 교과목의 계층성과 유기적 관련성을 고려해 야한다. 이는 과학을 포함하여 통합적 사고를 북돋아 주는 교양 교육의 구축에도 중요하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교양(liberal arts)의 본래 모습은 자유로운 비판적 사고를 지니고 통합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며,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인문학을 포 함한다. 흔히 과학에는 상상이 없이 논리만 있고, 인문예술에는 논리가 없이 상상만 있다고 여기는데 통합적 교양 교육은 논리적 사유와 상상을 함께 심화시켜 조각내기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추구해야 한다.


창의성 중심의 새로운 인간상, ‘떠오름사람(創發人)’

 근대부터 현대까지 과학과 사회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사람과 교육의 규정과 이념을 변화시켜 왔다. 고전물리학이 정립되고 산업사회의 시대였던 19세기에 사람은 근대 인본주의 교육을 받아 노동인 (homo laborans)으로 자리매김했다. 20 세기에 들어와서 근대물리학이 만들어지고 근대주의(modernism)가 등장하면서 나중 산업사회(post-industrial society)의 시대가 되었고, 사람은 신자유주의 직능교육을 받아 지식노동인(homo mentis)으로 자리매김했다. 20세기 말에는 나중근대주의 (post-modernism)와 더불어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지능정보사회 시대가 열렸고, 사람은 상상과 창의성 중심의 교육을 받는 상상인(homo imaginarius)을 지향한다. 오늘날 인류는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산업 화로 과거에 전혀 경험하지 못한 편리함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서 앞으로 한차원 높은 유토 피아의 길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땜빵 노동자로 전락하는 파멸적인 디스토피아의 길로 갈 수도 있다.

 이제 건너사람(trans-human)이나 나중 사람(post-human)이라는 모호함과 불확실성의 우려를 주는 지능 정보사회에서 우리 스스로 되돌아보고 지속 가능한 인류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생각의 틀과 삶의 방식을 마련할 때이다. 이에 상상인과 나중사람(posthuman) 을 넘어서서 새로운 인간상으로 떠오름사람(創發人·homo emergens)을 제안한다. 이는 개인과 집단의 두 층위에서 각 각 떠오름을 본질로 지닌 존재이다. 곧 논리 능력과 상상 능력을 온전히 활용함에 따라 창의성의 떠오름을 지닌 개인으로서의 사람이자, 또한 자연·사회·인간에 대한 통합적 사고능력과 소통능력을 겸비하여 상호참여를 통한 사회적 협력과 집단 지성의 떠오름에 기여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러한 ‘떠오름사람’을 길러내어 궁극적으로 ‘온생명’의 관점에서 ‘온문화’를 인식하고 ‘온의식’이 떠오르도록 이끄는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을 ‘떠오름교육’이라고 부르겠다. 이는 창의성이란 계획된 목적을 달성하려는 획일적 노력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자연스러운 복잡성을 띠고 작동하는 통합적 사고를 통해서 떠오를 수 있다는 인식에서 복잡성의 떠오름을 지향하여 논리와 상상의 창의성을 북돋아주고, 자연과 사회, 인간에 대한 통합적 사고능력, 그리고 소통과 협동 능력을 기르도록 돕는 교육이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서 인류가 ‘온생명’ 관점에서 ‘온문화’를 인식하고, 궁극적으로 앎과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스스로 성찰하는 지혜의 수준으로서 온의식이 떠오르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최무영 교수는 1987년부터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이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겸무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론 물리학(통계물리) 분야의 교육과 연구를 수행해오고 있다. 미국과 프랑스의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객원교수나 방문연구원으로도 활동하였고, 복잡계, 생명과 사회현상, 물리학기초론, 과학과 문화 분야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