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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대학교 장하석 한스 라우싱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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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답을 넘어서기 위한 과학교육

과학사적 탐구로 다원주의적 사고 길러야


이번 <서울과학교육>에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장하석 교수와 과학철학자로 눈을 뜨게 된 과학교육 경험, 학교에서 과학을 왜 배울까 하는 과학교육의 본질적인 문제, 그리고 우리 과학교육이 나가야 할 방향에 관해 이야기한다. 편집부에서 김솔(선유고) 편집위원이 주관한 가운데, 이인순 편집위원장(도봉중 교감), 이은주(서울개봉초), 김하나(남부과학교육센터 파견) 편집위원, 이인정 연구사(융합과학교육원 기획운영부)가 공동 참여했다.


김솔 안녕하세요, 교수님. 영국은 이른 아침일 텐데 원격 인터뷰 수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교수님께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서울 지역에서 마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과학을 어떻게 좋아하게 되셨는지요? 기억에 남는 학교 과학 수업이 있었을까요?


장하석 제가 과학을 좋아하게 된 과정은 여러 단계에 걸쳐서 일어났습니다.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던 이종화 선생님께서 처음에 많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자연 시간에 여러 가지 다른 성질을 가진 물질들이 있다는 것을 각종 금속 조각과 나무 조각을 관찰하며 배웠는데 그게 너무 흥미로웠어요. 이건 구리, 이건 아연, 이건 알루미늄…. 그것을 알아차린 선생님께서 그 금속과 나뭇조각 한 세트를 제게 주셨죠. 이런저런 실험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전선을 감아서 코일을 만들고 그 안에 철심을 넣어서 전자석을 만들어 본 것이 신기했습니다. 6학년 때는 학교 대표로 뽑혀 서울시 과학경시대회를 준비하면서 기본적인 실험을 배웠는데, 내 손으로 뭔가를 직접 만들고 관찰한다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알코올램프로 유리관을 가열하여 말랑말랑하게 한 뒤에 구부려 ㄱ자로 만들고 또 연해진 부분을 조심스레 양쪽에서 잡아당겨 가느다랗게 만든 후에 식혀 자르면 두 개의 스포이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과학을 좋아하는 애들이 관심을 보이면 선생님들이 ‘그래, 너 나가봐라’ 그렇게 뽑아서 출전했고, 상 타면 좋고 안 타도 그만이라는 분위기였습니다.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맘껏 배우고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시기에 대중과학을 접하면서 과학의 이론적 차원에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계기는 중학교 1~2학년 때 TV다큐멘터리 <코스모스>를 보았던 것입니다. 칼 세이건(Carl Sagan)이 전해주는 과학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고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진화론에서 우주론까지 모든 게 신기했고 어떤 오락보다도 더 재미있었습니다. 나중에 『코스모스』 번역본을 사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김솔 교수님이 중학생 때 『코스모스』를 좋아하신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코스모스』는 두께가 상당한데도 과학을 좋아하는 중·고등학생들이 지금도 많이 읽고 있습니다. 어떤 매체에서 그 시절 교수님께서 『코스모스』를 번역본으로 12번, 원어본으로 11번 읽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정말인가요?


장하석 확인해 드려야겠네요. (웃음) 말씀드리자면 그 시절 『코스모스』 번역본은 거의 교회 다니는 사람이 성경을 읽듯 항상 옆에 두고 보았습니다. 또 원어본을 읽으면서 영어를 배웠어요. 거기에 어려운 단어도 많이 나오고 난해한 문장도 많지만 이미 한국어판을 통해 무슨 이야기인지 다 아는 내용이니까 원문을 한 문장, 한 문장 해독하면서 그렇게 1년 넘게 고생해서 한번 통독하였습니다.


김솔 그 정도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내용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장하석 제일 기억 남는 게 맨 마지막 13장 제목이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Who Speaks for Earth?)’입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나라를 위해 주장하며 전쟁하는데 지구 전체, 즉, 인류 전체를 위해서 과학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처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무척 놀랐고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칼 세이건이 말하는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 ‘세계시민주의’로 번역하는데, 저는 그렇게 세계시민주의자가 됐습니다.


김솔 『코스모스』를 통해 코스모폴리탄으로 초대받는다니 너무 멋집니다. 고등학교 때는 어떠셨습니까?


장하석 고등학교에 가니 고전역학을 배우는데, 그때 깨치게 된 것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엄격하게 이해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공식을 풀어서 답이 정확하게 나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죠. 한성고등학교 안준섭 선생님께서 물리를 참 명쾌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뉴턴의 중력이론을 배우고 난 후에는 그 이론에 따라 물체의 궤적을 계산할 수 있게 해주는 미적분을 너무나 배우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 유학을 떠나 미적분이 들어간 물리 과목을 들으며 물리학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 수준으로 올라가니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많이 접하게 됐습니다. 그때 강한 인상을 주셨던 물리 선생님 중에 Hughes Pack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물리학 석사까지 하셨지만, 그동안 저학년만 가르치다가 처음으로 미적분이 들어간 물리 과목을 맡으셨다고 했습니다. 선생님도 처음 풀어보시는 문제가 많았고 해법을 확실히 모르실 때가 있었는데, 권위를 세워 얼버무리시지 않고, ‘나도 잘 모르겠다, 같이 궁리해 보자’ 하셨습니다. 학생들은 더 신이 나서 이런저런 제안을 하고 토론하며 해답을 구했습니다. 저는 Pack 선생님의 겸허한 모습을 지금까지도본받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과학에 대한 꿈을 곱게 키워가며 열심히 공부해서 결국 최고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김솔 교수님 대학에서도 물리학 잘하셨을 것 같은데요. 과학철학으로 넘어가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장하석 학부에서 받은 과학교육은 큰 실망이었습니다. 실험 시간은 이미 나와있는 정답을 끌어내는 과정에 불과했고, 미지의 자연을 탐구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론 교육도 그와 비슷했습니다.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의 함의에 대해 질문하면 교수님들은 그런 철학적 문제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문제 푸는 숙제나 충실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고민 끝에 과학철학으로 전공을 돌려 대학원에 진학하고 말았습니다.



학교에서 과학을 왜 배울까?


김솔 저희 편집위원 모두가 교수님께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입니다. 학생들이 ‘과학을 왜 배워야 하냐’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교사로서 참 답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과학을 왜 배워야 할까요?


장하석 학생들이 정말 그렇게 질문을 하나 보죠?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다들 그냥 하기 싫다면서도 ‘이걸 왜 배워야 하냐’고 묻지 못했는데, 시대가 많이 바뀌었네요. 물론 자연대, 공대, 의대 쪽에 진학하고 싶은 학생들에게는 기능적 유용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과 학생에게 의미가 없고, 이과 학생에게도 부분적인 의미일 뿐입니다. 전문가가 될 훈련을 넘어서는 과학교육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중요한 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이 갈수록 높아지는 현대사회에서 시민들은 어느 정도 과학에 대한 이해를 갖춰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자들이 말하는 사실과 이론을 배우는 것보다, 과학적 연구와 과학적 추론, 검증, 논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좀 슬픈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여러 다른 나라도 과학 이론에만 집중하지, 과학의 기본 정신에 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좀 거창하게 얘기하면 이 과학 정신이 없으면 현대 문명을 이룩하지 못했다고 보거든요. 과학 활동의 본질을 이해하는 시민은 첨단과학의 내용을 몰라도 과학기술 정책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분야의 전문 지식이나 기술은 없지만, 변호사, 미용사, 의사, 건축가 등 내게 필요한 적합한 전문가를 선택하고 고용할 식견을 갖춰야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죠.
둘째,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문화적 활동이고 그러한 차원에서 과학은 모든 문화인에게 가져다주는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문학이나 종교를 통해 우리 인생을 해석하듯, 과학을 통해서도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에게 깊은 만족감을 주고 더 의미 있는 삶으로 초대합니다. 과학을 문화의 일부로 볼 때 과학의 가치를 기술적, 경제적으로만 제한하는 편협한 시각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음악이나 영화 다른 예술을 즐기고 거기에 참여하며 삶을 윤택하게 하듯 과학도 그런 문화적 차원에서 육성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학생들이 과학을 기쁘고 재미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도와준다면 그것이 가장 세련된 과학교육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인순 교수님께서는 앞서 학교 과학교육이 과학 정신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표하셨는데요. 학교 과학교육이 놓치면 안 되는 과학 정신은 무엇일까요?


장하석 중요한 건 ‘경험주의’라고 생각합니다. 16~17세기 중세 유럽에서 진리란 왕이나 교황이 옳다고 정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과학자들은 직접 관찰하고 실험해서 알아보자고 했죠. 어떻게 보면 저항 정신이고 민주적인 부분이거든요. 누가 정해준 답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하고, 당신도 직접 실험하자는 거죠. 각자 한 경험이 일치하면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고, 일치하지 않으면 더 연구하는 것. 각자 상상력을 발휘해 가설을 세우지만, 검증은 철저하게 하는 게 과학 정신 아니겠습니까? 제가 정말 안타까운 게 많은 학교 현장에서 직접 실험하고 경험해서 의견을 세우는 과정이 빠져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정답 위주의 교육이 과학 정신과 맞지 않는 거죠. 그런데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과학은 정답이 확실한 과목이잖아요. 문제는 그 정답을 어떻게 알게 됐고, 어떻게 동의가 됐는지 그 과정을 대부분 과학교육에서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과학사 연구가 과학교육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을 처음 접하는 학생들이 배워야 할 내용과 과학을 처음 만들어냈던 옛날 과학자들이 고심해서 해결한 문제 사이는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인순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문화’라는 단어가 크게 다가옵니다. 정답을 넘어서 과학이 하나의 문화가 되려면 우리 과학교육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장하석 좀 더 현실적인 방법을 고민하자면 자유롭게 실험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때 생각해 봐야 할 것은 평가 방식입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나 과학교육을 보면 ‘정답’에 끌려다닙니다. 특히 학교 선생님들이 정답을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정답을 버리는 게 두려움인 거죠. 정답 문화와 평가 문화가 맞물려서 그걸 깨기가 정말 힘든 것 같아요. 평가의 개혁이 없이는 현실성 있는 교육 개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교육학자뿐 아니라 현장 교육자들도 고민하고 연구해 주셔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정말 실망스러웠던 게 실험 시간에 실험결과가 정답대로 안 나오면 점수를 깎았어요. 그러니까 학생들이 어떻게 하냐면 실험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든 알고 있는 정답을 끌어내는 거죠. 그게 안 되면 그냥 거짓말로 쓰거든요. 정답을 말하면 만점을 주고 아니면 점수를 깎는 평가는 하기도 쉽고 공정성을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정답을 넘어서는 교육을 하기 위해선 정답을 넘어서는 평가 방식을 요구합니다. 과학자 간에 벌어지는 논쟁을 따라가고 학생들이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는 과정을 논술고사 식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정답이 확실치 않은 실험을 하게 한 후에 그 결과를 어떻게 보고하고 분석하는지를 평가할 수 있을까요? 가상적 실험결과를 준 후 그것을 설명해 보도록 할 수 있을까요? 전반적 평가 방법이 제가 학교 다닐 시절의 사지선다형 차원을 넘어선다는 전제하에, 여러 가지 창의적인 고안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원성, 융합, 과학교육의 정수


이인순 교수님께서 『과학, 철학을 만나다』 서문에서 ‘과학의 역사를 잘 들여다보면 실제로 다원주의가 과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해왔다는 것이 보입니다’라고 하셨는데요. 구체적인 사례를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하석 우리가 보통 아는 과학사는 승자들이 쓴 역사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피상적으로 아는 과학사에서는 다원주의가 보이지 않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과학사를 파고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화학에서 원자론의 아버지라 불리는 돌튼(John Dalton)이 물을 H2O가 아니고 HO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220년 전 그 당시의 화학자들이 분자 구조를 확실히 알 방법이 없었다는 점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당연했습니다. 후대에 어떻게 물이 H2O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가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방대한 역사학적 연구가 필요했고 그것이 『물은 H2O인가?(Is Water H2O?)』를 쓴 이유입니다. 또 다른 예로 광학에서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 하는 논쟁이 19세기 내내 있었어요. 그 두 이론이 계속 싸우면서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실험하고, 반대파에서는 상대편을 반박할 증거들을 찾으면서 많은 과학적 사실들이 밝혀지기도 했죠. 그렇게 계속된 논쟁은 지금에 와서 둘 다 틀렸다는 결론이 났죠. 아니, 둘 다 맞았다고 보는 게 더 좋겠죠. 양자역학에서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500년 후에 미래의 과학자들이 돌이켜 본다고 하면 2024년의 과학이 좀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과학은 계속 진보하니까 500년 후 과학자들은 우리와 똑같은 과학이 아닌 상상할 수 없는 기막힌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과학사를 보면 오늘의 정답은 내일의 0점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니, 학생들한테 과학의 이런 면을 인식하게 할 수 있으면 좀 더 수준 높은 교육이 되지 않을까요?


이은주 교수님께서 10년 전 EBS에서 진행하셨던 <과학, 철학을 만나다> 강연 영상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데요. 그 강연 이후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전 세계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교수님께서 과학교육 분야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느끼시는 부분이 있는지, 이런 변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장하석 10년 전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과학철학자들도 거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제가 가장 느끼는 것은 두 가지인데 우선 과학기술의 발달은 정말 예측불허라는 점이에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공지능 분야는 비전이 없다고 많이 얘기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완전히 바뀌었죠. 게다가 생성형 인공지능의 경우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창작 영역에서 월등히 뛰어나니까 더 충격적이었고요. 두 번째로는 그러면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란 생각이 드는 거죠. 인간이 육체노동을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고, 글쓰기 같은 정신노동도 인공지능이 대체하면 사람은 뭘 할 수 있는지, 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거기에 맞추는 교육은 어떤 것인지 그게 다 막막하고 걱정되고 답이 없습니다.


이은주 네, 어쩌면 과학 철학적 생각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장하석 인간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목적에 관한 것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아직까지는 인공지능은 우리가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는 역할을 하는 거고, 목표를 정해주고 그런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은 인간이죠. 그러면 우리가 가치 판단을 위한 교육은 어떻게 하는지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우리가 과학교육을 하면서 하지 않은 질문 중 하나는 ‘우리가 과학은 왜 하는가?’입니다. ‘학생들이 과학을 왜 배우는가’를 물어보는 것과는 좀 다르죠. ‘과학은 무엇을 위해서 하는가’는 정말로 정답이 없는 질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솔 근래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흐름은 우리를 또 다른 패러다임 속으로 초청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패러다임의 전환기 속에서 사는 것일까요?


장하석 과학이 어떤 하나의 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들어간다기보다는 점점 패러다임이 오랫동안 고정되지 않고 자주 바뀌는 시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빅데이터의 시대가 왔다고 하지만 앞으로 과학이 더 발전해 나가면서 데이터를 얻고 종합하고 분석하는 방법도 계속 변화할 것입니다. 인공지능 시대라고 하지만 인공지능이야말로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고 변형될지 정말 예측불허입니다. 21세기 과학은 이런 패러다임에서 이루어지니까 거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고정적인 생각을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20세기 후반 미국 교육학계의 거장이었던 슈왑(Joseph Schwab)은 1962년 출간된 『과학을 탐구로서 가르치기(The Teaching of Science as Enquiry)』에서 현대 과학은 갈수록 ‘안정적 연구(stable enquiry)’보다 ‘유동적 연구(fluid enquiry)

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현시대에 필요한 과학교육은 유동적 연구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미 60년 전에 했던 이야기인데, 갈수록 맞아떨어지는 듯합니다. ‘패러다임(paradigm)’이란 용어를 만든 쿤(Thomas Kuhn)은 과학 연구는 대부분 불변하는 패러다임 내에서 이루어지며,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착된 후 또 그것을 따라 안정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슈왑은 그것은 옛날이야기이고 현대 과학에서는 정해진 패러다임 내에서 하는 안정적 연구 비중이 점점 줄어든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슈왑의 관점이 더 통찰력이 있었다고 봅니다. 쿤 자신도 과학자의 임무는 전통을 따르면서 혁신을 해야 하는 역설적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과학 연구에는 피할 수 없는 본질적 긴장과 갈등이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지금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세네갈 출신 철학자 응곰(Mamadou Ngom)은 이 불가피한 갈등을 관리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과학교육의 정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김솔 패러다임을 넘나드는 모습에서 ‘융합’을 생각합니다. 저희 <서울과학교육> 발행기관이 ‘융합’과학교육원이기도 합니다.


장하석 쿤이 원래 이야기한 개념을 보면 패러다임은 과학 전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 과학 분야마다 각각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학제 간 연구나 융합적 연구를 수행하려면 물론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섞어서 사용해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그냥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놔두는 것이 좋은데, 제도권 교육에서 쉬운 일은 아니죠. 그나마 학생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원주의적인 생각을 심어주는 일 같아요. 어느 한 과목에서도 서로 전혀 다른 이론이 있을 수 있고, 어느 한 이론만 맞고 나머지는 틀린 게 아니라 각각의 이론이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각 이론의 일리있는 부분을 어떻게 끌어모아서 더 훌륭한 걸 만들어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고의 틀을 보여주는 거죠. 그다음에 진짜 융합하는 것은 창의적인 개인이 해야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융합이 잘 된다’ 그런 알고리즘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상충되는 패러다임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사용하는지에 관한 일반적 방법이란 없습니다. 그때그때 특정한 상황에 따라 방법을 고안해 내어야 합니다. 그러한 과업을 해 낼 수 있는 인재를 교육하는 방법도 정해진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선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의 습관을 길러주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솔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의 습관을 길러주는 과학교육을 말씀하시니 과학교사로서 참 책임이 큽니다. 교수님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장하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