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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순 교수 KAIST 인류세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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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류세에 살고 있다!
지구 위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


세계의 일상을 바꾼 신종 바이러스, 인류의 '숨'을 위협하는 지구 온난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재난과 위기는 우리 모두에게 앞으로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 '인류세'라는 관점에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본 학자들이 있다. 바로 KAIST 인류세센터장 박범순 교수는 학부에서는 화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는 과학사를 전공했으며, KAIST에서 역사학적 방법론으로 과학정책의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여러 분야 사이에서 새로운 학문 분야가 생성되는 사회문화적 현상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실제로 학문의 융합과정을 경험하고 만들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인류세연구센터를 설립해, 행성 차원에서의 위기를 인간 중심적 사고를 넘어 자연과 문화가 분리되지 않는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인간이 만든 지질시대, 인류세


2000년 2월 멕시코에서 ‘국제 지권-생물권 연구계획’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이 회의에 참석한 대기화학자 파울 크루첸(Paul Crutzen)은 ‘우리는 이제 홀로세가 아닌 인류세(人類世)에 살고 있다’고 선언했다. 인류세는 인류의 활동으로 인해 생겨난 지질시대를 의미한다.


가장 최근의 지질시대인 홀로세 이후 인간은 환경 변화, 기후 위기 등 지구의 모습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크루첸은 인류세를 ‘인간이 지질학적 힘이 된’ 시대라고 정의했다. 그 근거로 인구 및 에너지 사용의 증가, 온실가스 배출 급증, 삼림 파괴, 수산물 고갈 등을 들었다. 그리고 인간의 활동으로 지구 시스템이 변화하고, 변화한 지구 시스템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오존층 구멍을 발견해 노벨화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석학의 발언은 뉴밀레니엄이라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찼던 인류에게 충격을 안겼다.


크루첸의 발언 이후 인류세는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저명 과학잡지에 등장하면서 국제적인 유행어가 됐다. 2014년 한 해에만 200편이 넘는 인류세 관련 논문이 나왔고, 인류세 관련 학술지가 3개나 창간됐다. 지질학계에서는 2009년 인류세를 다루기 위한 워킹그룹이 만들어졌고 10년간 예비조사 끝에 본조사에 들어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워킹그룹은 인류세의 시작점으로 대가속이 일어난 1950년으로 하고, 지표 화석으로는 방사성 물질이 들어간 것을 고려하자고 제안했다.


KAIST 박범순 인류세연구소센터장은 크루첸이 처음 ‘인류세’를 언급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많은 괄목할만한 성과가 있다고 전한다. ‘대가속, 티핑포인트, 찜통지구, 지구위험한계선’ 등 인류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개념을 만들었고, 2016년 UN 기후변화협의체 IPCC 보고서에도 인류세 개념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인류세연구센터 김형준 교수는 인간의 영향이 지금처럼 계속될 때 가뭄과 폭우 및 홍수로 인한 재난은 얼마나 자주 일어날지 예측한 연구논문을 올해 네이처지에 발표했다. 그중에서 인류세 워킹그룹이 국제층서위원회에 인류세 공식화 제안서 제출은 인류세 연구에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으로 진단했다.


”인류세 워킹그룹은 2022년 국제층서위원회에 인류세에 관한 공식 제안서를 제출했고, 현재 심의 중입니다. 일단 지질학계에서 공식화하면 지구과학 관련 교과서가 모두 바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인류세가 가설 또는 유용한 개념으로서 지위를 가지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인류세가 공식화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매우 중요한 단계를 통과한 셈입니다.”


이제 인류세 개념은 과학계뿐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의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국내에도 2018년 카이스트에 인류세연구센터가 문을 열었고, 2019년 EBS의 <다큐프라임: 인류세> 3부작은 국내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킴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도 다큐멘터리 부문 상을 여럿 수상하며 널리 알려졌다. 인류세는 이제 지질학적 가설을 넘어 생활 속 용어가 됐다.


인류세의 시대, 인간 너머의 관점


이제 인류세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 구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일 것이다. 인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활동으로 인해 지난 한 세기, 특히 1950년대 이후 지구 시스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가 너무 커서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를 만들어 불러야 할 정도라는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경고의 메시지이다.


최근 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이상기후로 인한 재앙은, 인간 활동이 지구 환경에 일으킨 변화가 그 원인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달리 순수한 자연재해로 분류될 수 없다. 2020년 발생한 팬데믹은 단순히 생물학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경제 시스템의 결과이기도 하고, 지구 온난화와 생태계 파괴로 인한 야생동물 서식지 변화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은 많은 연구로 증명되었다. 이처럼 인류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박범순 센터장은 인간을 중심으로 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류세 문제들은 지구라는 행성적 차원에서 인간과 자연이 수많은 다른 요소들과 복잡하게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컨대 기존의 환경 개선은 미래세대를 위해 자원을 아끼고 조심해서 쓰자는 지속가능성의 개념을 주창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입니다. 인간 중심적인 환경 개선은 녹색 자본주의 형태로 나타나 원래의 목적을 흐릴 때가 있습니다. 반면에 행성적 관점은 인간을 언급하지 않고 모든 생명체가 함께 살 수 있는 거주 가능성을 논하는 것입니다.”


인류세 개념은 지금까지 인간과 자연이 맺어온 관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그동안 인류가 자연을 통제하고, 이용 가능한 자원으로만 대했던 태도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한다. 인간도 지구 시스템의 일부로서 행성적 차원에서 생각하는, 인간 너머의 관점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인류세연구센터, 무엇을 연구하는가


그렇다면 인류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 실마리는 지난 2018년 6월에 출범한 KAIST 인류세연구센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류세연구센터는 인간 활동이 지구에 남긴 흔적에 대한 현상을 연구하고, 그것이 초래하는 위험에 대한 이해와 실질적인 대응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인류세연구센터는 크게 센싱(Sensing), 인해비팅(Inhabiting), 이매지닝(Imagining)이라는 세 개의 연구그룹으로 나뉜다. 센싱그룹은 인류세 시대의 전 지구적 환경 변화를 과학적으로 포착하는 연구를 통해 손상된 행성 상태를 파악한다. 인공위성, 컴퓨터모델링, 지층 시추 등의 기법을 활용해 기후 변화, 해수명 상승, 대규모 지진, 미세먼지 등 지구 내적 변화 및 인간 활동을 관찰 기록하고, 이를 사회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남우현 박사팀의 인류세의 시작점으로서 쓰레기 매립지 연구가 있다.


인해비팅 그룹은 인류세에서 빠른 변화를 겪고 있는 인간 삶의 양식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정책적이고 기술적인 해법을 모색한다. 대표저인 연구로 전치형 교수의 호흡공동체 연구가 있다. 공기를 자연의 매질이자 공동체 관계를 잇는 매질 개념으로 인식해 미세먼지, 코로나19, 폭염이라는 공기 위기를 주요 사례로 분석했다.


이매지닝 그룹은 인간과 지구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는 예술적 상상을 시도한다. 다른 그룹의 연구성과를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별전시나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 과학 활성화에도 힘쓰고 있다. 대표적으로 최명애 교수의 DMZ 생태에 관한 융합적 연구가 있다. 인간의 활동이 지구에 짙은 흔적을 남긴 것을 인류세라고 할 때 DMZ은 인위적인 ‘미개입’을 통해 형성된 또 다른 의미의 인류세적인 공간이다. 최명애 교수의 연구는 인류세 공간인 DMZ에서 인간-두루미-땅의 관계 맺기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왜 인류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인류세연구센터가 처음 설립된 당시 박범순 센터장은 국내 학계 및 대중에게 인류세를 알리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았다. 2019년 EBS와 인류세연구센터가 공동기획한 <다큐프라임: 인류세> 3부작은 국내에서 인류세에 관한 관심을 폭발적으로 불러일으켰고, 2021년 서울시립과학관과 연계해 개최한 <인류세 전시회>, 일민미술관의 예술-사회-학술 연계 프로그램인 ‘입법극장’, SBS 서울 디지털 포럼 2020의 ‘인류세와 팬테믹’ 등도 그런 활동의 일환이다.
또 다른 축으로 교육 분야에서는 인류세와 관련한 대학원 수업을 개설하는 한편, 교재나 동영상 강의를 만들어 카이스트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와 공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마련했다. 이런 노력들로 다른 대학에서도 인류세를 주제로 한 과목들이 생겨나고 있다.


박범순 센터장은 이제 인류세 개념을 알리는 데 어느 정도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앞으로는 한국의 인류세 연구가 어떤 보편성과 특이성을 가지는지에 주목할 계획이다.


“인류세연구센터는 전 세계 최초로 ‘인류세’라는 단일 주제를 위해 설립된 연구하는 기관입니다. DMZ이나 일제 식민지배의 경험, 1950년대 대가속 시기의 엄청난 경제 발전 등 한국에서만 관찰할 수 있는 굉장히 독특한 현상들이 인류세 연구에 어떤 보편성과 개성을 나타내는지 주목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 동아시아 내 자연 현상을 포착하여 데이터를 모으고, 독특한 인류세적 공간으로서 DMZ가 가진 의미와 국제적 관심을 활용하는 등 인류세 연구를 차별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인터뷰가 거의 끝날 무렵 던진 ‘학계 연구자나 환경활동가가 아닌 일반 시민이 인류세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박범순 센터장은 “인간이 지구를 바꾸고, 바뀐 지구가 인간의 생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간단하게 답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수없이 환경 위기와 자연 재난에 대한 경고를 들어왔다. 문제는 그 위기가 당장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지금 당장 변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 그 변화의 시작은 인간이 주변 환경과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모든 비-인간 존재들과 연결되어 운명을 함께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도 물질적인 세계의 구성 요소의 하나라는 생태적 인식은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에 인간의 생존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