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과학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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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께 물려받은 아름다운 과학유산
배우고 융합하여 오늘에 맞게 재창조해야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과학유물을 떠올려 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경주 첨성대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그리고 세계 최초의 우량계 측우기, 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 등 ‘세계 최고·최초’라는 수식어가 가장 먼저 강조된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무엇인가를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초라는 수식어 못지않게 ‘과학유물’에서 강조되는 요소가 ‘얼마나 과학적인가’라는 설명이다. 당연히 과학유물이기 때문에 ‘과학적’ 요소가 그 가치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과학적’이라는 개념이 현대의 ‘과학 패러다임’ 안에서 정의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학유산
국립과천과학관 ‘전통과학관(2008)’· ‘한국과학문명관(2018)’
선조들이 우리에게 남긴 과학유산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 국립과천과학관 <전통과학관>(2008)과 <한국과학문명관>(2018)의 사례를 살펴보자. 2008년도 개관한 국립과천과학관 <전통과학관>은 국민들에게 우리의 자랑스러운 과학유물을 중심으로 전통시대 선조들의 지혜를 보여줌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워 주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전시관은 현대 과학기술의 분야로 분류해 5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천문기상학을 중심으로 한 ‘하늘의 과학’, 지리·지도학 분야 ‘땅의 과학’, 의학 분야 ‘사람의 과학’, 의식주 분야 ‘생활의 과학’, 응용기술 분야 ‘응용과학’으로 나눠진다. <전통과학관>을 개관한 지 10년 만에 전체 리모델링을 해서 2018년 11월 14일 <한국과학문명관>으로 재개관을 했다. 전시관 명칭을 <전통과학관>에서 <한국과학문명관>으로 변경하면서 전시관의 메시지도 바뀌었다. <한국과학문명관> 입구 패널에는 “한국 문명은 어떻게 독자적인 생명력을 유지하며 세계 문명의 발전에 동참할 수 있었을까?
한국과학문명관에서 그 ‘오래된 미래’를 찾아 떠나보자.”라며 한국 문명 속 과학기술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전시 메시지를 잡았다. 전시 주제도 한국 문명을 구성하는 5개 요소인 ‘정치’, ‘복지’. ‘경제’, ‘문화’. ‘군사’로 나눠 과학기술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과학문명관>에서는 세계 최초·최고의 과학유물을 먼저 내세우지 않는다. 과학유물들이 당시 사회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과학유물’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과연 전시에는 어떻게 적용됐을까?
전시 방식의 변화, 또 다른 각도로 바라보는 과학유물
<전통과학관> ‘하늘의 과학’과 <한국과학문명관> ‘정치와 과학기술’ 주제의 대표전시물은 똑같이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전통과학관>의 ‘천상열차분야지도’ 전시 패널에는 “1395년 제작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이다.”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이어 하늘을 28개 구역으로 나누었고, 적도좌표계를 기준으로 1,467개의 별들을 밝기에 따라 구분해서 새겨 놓았다는 천문학적 요소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전시물의 좌우로는 ‘별자리 유적’과 조선후기 서양천문도에 영향을 받아 제작된 ‘황도남북양총성도’를 전시하고 있다.
<한국과학문명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설명 패널의 시작은 “관상수시(觀象授時), 하늘의 운행을 관측하여 백성에게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알려준다. 관상수시는 통치자가 나라를 질서 있고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가장 중요한 책임과 임무였다.”라 적고 있다. 물론 세부 설명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되었다는 점과 천문학적 요소도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전시 배치는 왕의 옥좌를 중심으로 우측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1395)’를 전시하고, 좌측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1402)’를 배치하여 포토존으로 연출하였다. 그리고, 설명 패널에 “조선 왕조는 천상의 질서를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천하의 질서를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담아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라고 그 상징성을 강조한다.
즉, <전통과학관>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과학적 가치’를, <한국과학문명관>은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상징하고 있는 ‘정치이념적·역사적 가치’를 중시하는 차이를 보인다. 과학유물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통과학관>과 <한국과학문명관>에서 전혀 다른 주제로 배치한 전시물들도 있다. 바로 ‘측우기’와 ‘대동여지도’이다. <전통과학관>에서는 ‘측우기’는 ‘하늘의 과학’에, ‘대동여지도’는 ‘땅의 과학’에 배치하였다. 이에 반해, <한국과학문명관>에서는 ‘측우기’와 ‘대동여지도’ 모두 ‘경제와 과학기술’ 주제로 구분하였다. ‘측우기’의 경우 각 지역의 강우량에 따라 형평성 있는 조세를 책정하기 위해 발명했다는 역사적 해석과 실제 140년 이상 측우기로 강우량을 관측해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경제적 가치를 더 의미 있게 보여주려 했다. ‘대동여지도’는 짝을 이루는 ‘대동지지’와 합쳐 ‘신대동여지도’라는 체험전시물로 개발하였다.
일반적으로 전통시대 지도 제작 기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만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정호는 ‘대동여지도’(1861) 제작 이후 마지막으로 ‘대동지지’라는 역사지리지를 편찬하였다. ‘신대동여지도’ 체험전시물에서는 22첩의 ‘대동여지도’에 32권의 ‘대동지지’를 보완해 효율적으로 국토정보를 보여주려 했던 김정호의 의도를 강조했다. 이외에도 <한국과학문명관>에 전시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은 지식보급을 위한 대량 인쇄보다는 지식 보전을 위한 소량다종의 책을 출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음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동의보감’은 치료보다 양생을 더 우선시한 예방의학서로서의 가치를 드러내 보이려 애썼다. 물론 과학유물의 ‘과학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과학관의 경우 박물관과 달리 ‘과학적 가치’를 ‘역사적 가치’보다 더 중시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 보일 수도 있다.
과학유물 대부분은 ‘과학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서로 상충하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발명되거나 사용된 과학유물을 현대과학적 가치로 해석해 왜곡하거나 재단하는 사례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 논란의 중심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진 첨성대가 있다. 현대 천문학적 관점에서 첨성대는 천체 관측을 위한 천문대로 보기 어렵다며 불교 재단이나 상징조형물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천체를 관측하기 위한 천문대라기보다는 첨성대 자체가 해시계로 사용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지금까지도 첨성대의 기능에 대한 논쟁은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첨성대의 기능을 현대 과학적 관점이 아닌 당시 하늘을 관측한다는 것이 어떤 행위였으며 무슨 상징성을 지녔는지를 밝혀 재평가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상호 보완되는 ‘과학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
모두 함축한 새로운 단어 제안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비과학 또는 사이비과학으로 치부되는 한의학, 풍수, 명리학 분야의 유물들은 과학유물로 인정할 수 있을까? 과학유물을 평가하는 데 있어 ‘과학적 가치’가 우선시 된다면 한의학, 풍수, 명리학 분야 유물은 민속유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 비록 전통시대 사람들에게 한의학, 풍수, 명리학도 천문학이나 지리학과 같이 자연의 이치를 이해해 인간의 삶에 적용하려 했던 자연철학의 한 분야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분야의 유물을 과학유물로 인정하기 어렵다면 ‘과학문화재’라는 용어로 포괄하는 것은 어떨까? ‘과학문화재’라는 용어가 지금도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명확한 정의 없이 과학유물, 과학유산 등과 같은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과학유물’이 현대 과학의 가치를 중시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면, 현대 과학의 가치뿐만 아니라 과거 과학이 지니는 문화적·역사적 가치도 함축하고 있는 ‘과학문화재’라는 용어로 정의해 사용하기를 제안해 본다. 글을 마무리하며 <한국과학문명관>에 방문하여 에필로그 공간에 있는 아래 문구를 참조해 한국 과학기술의 오래된 미래를 찾아보기를 기대한다.
5,000년 한국 문명을 이끌어온 과학기술의 오래된 미래는 창의성(배우고 융합하여 우리에 맞게 재창조), 세계성(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내보내고), 역사성(독창적인 과학기술 전통을 계승 발전)에서 찾을 수 있다.
남경욱 학예연구관
남경욱 학예연구관은 국립과천과학관에서 15년 넘게 전시, 교육, 행사 등 기획을 담당해 왔다. 한국과학기술사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한국과학문명관>, <동의, 허준>, <세종·김담, 조선의 하늘을 열다>, <과학한국 최초의 시도들>, <석주명의 삶과 나비>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