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수업하려고 보드게임 만든 이야기
페이지 정보
본문
보드게임, 과학교육 현장에 널리 확산 중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더 많은 표정을 짓게 하자
지금 우리 학교 현장은 AI, 빅데이터, 스마트 기기 등 첨단 기술이 점령하고 있다. 하지만 집에서도, 길에서도 스마트폰에 빠진 아이들의 시선을 수업 시간마저 태블릿 유리 화면을 향하게 해야 하는가? 나는 스마트 기기가 가득 찬 지금의 교실이야말로, 물성 매력과 대면 소통 촉진이 가장 큰 장점인 보드게임이 오히려 절실해진 시점이라고 확신한다. 한 번 더 서로의 눈을 바라보게 하고, 더 많은 표정을 짓게 하고, 더 생생한 목소리를 나눌 수 있도록, 보드게임은 도울 수 있다.
진화적 본성과 보드게임
아이들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 결코 평범하게 걷지 않는다. 오직 하얀색 선만 아슬아슬하게 밟으며 “검은색 아스팔트를 밟으면 용암에 빠져!”라고 외치곤 한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다. 아이들의 뇌 속에 깊이 각인된 ‘진화적 프로그래밍’의 발현이다. 아이들은 지루하고 평범한 걷기라는 행위에, 조금 더 품이 들더라도 굳이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목표를 설정한다. 이를 통해 다가올 진짜 위험에 대비하여 스스로의 신체 협응력과 인지 능력을 끊임없이 훈련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유희를 통해 학습하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이며, 타고난 게임 기획자다.
게이미피케이션 전문가 칼 카프(Karl M. Kapp)는 자유로운 놀이(play)와 게임(game)을 엄격히 구분한다. 단순한 유희인 놀이와 달리, 게임에는 명확한 목표와 규칙, 그리고 정량화된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에는 ‘행위에 대한 성공이나 실패의 피드백’이 뒤따른다. 횡단보도 용암 놀이에서 선을 빗겨 디뎠을 때 “앗, 죽었다!”라며 느끼는 아쉬움이나, 무사히 건넜을 때의 짜릿한 쾌감이 바로 그것이다. 건강한 형태의 도파민을 동반한 이러한 피드백은 우리 뇌가 다시 도전하고 더 집중하게 만들며, 이때 발생하는 긍정적 스트레스가 고도의 몰입과 장기 기억을 이끌어낸다.
이 강력한 진화적 본능을 과학 교실로 끌어올 수는 없을까? 도구를 쓰는 인간 ‘호모 파베르’, 생각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 그리고 놀이하는 ‘호모 루덴스’의 본성을 모두 결합하는 도구. 그 교집합에 ‘보드게임’이 있다.
과학교육과 보드게임
기존 과학 보드게임을 수업에 활용해 보고자 연구하였으나, 규칙을 배우는 데만 한 시간이 걸리거나, 가르치려는 개념과 거리가 멀었다. 이에 신성중 과학 선생님들과 함께 직접 연구에 나섰다. ‘5분 설명으로 30분 동안 플레이할 수 있을 것’, 그리고 ‘학습 목표를 정확히 겨냥할 것’이 핵심 원칙이었다. 힘든 과정이었으나, 그 고단함은 교실 속 아이들의 반응 앞에서 눈 녹듯 사라졌다.
수업시간, 교사의 역할은 조를 편성하고 보드게임을 나눠주고, 규칙을 설명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나머지는 아이들의 몫이었다. 규칙과 원리를 서로 알려주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깔깔 웃고 아쉬워하고 탄성과 탄식이 교차하는 가운데, 아이들의 추억 속에 오늘의 활동이 남게 될 터였다.
이 긍정적인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개 수업과 연수를 열어 선생님들을 만났다. 그런데 선생님들의 반응은 주로 “선생님, 너무 재미있는데 만들 엄두가 안 나요. 그냥 사서 쓸 수 있게 팔아주세요.”였다. 행정과 생활지도로 정신없이 바쁜 동료 선생님들께 실제로 확산되고 쓰이기 위해서는 모델 제시나 파일 공유를 넘어, 완성된 교구의 형태로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보드게임 출판사에 과학 수업용 보드게임 출판에 뛰어들어야 할 이유와 포트폴리오를 담은 제안서를 보내보았다. 하지만 출판사의 입장은 조심스러웠다.
“작품이 좋고 교육적 가치도 공감합니다만, 수요에 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였다. 이에 교사 커뮤니티를 통해 취지를 설명하며 설문을 부탁드렸고, 수많은 선생님께서 수요 조사에 기꺼이 참여해 주시며 지지를 보내주신 덕분에 출판이 결정될 수 있었다. 이후 개발팀과 끝없는 수정과 개선 과정을 거친 끝에, 나와 한규선 선생님의 [15℃], [응결게임], [케미술사]가 2026 대한민국 교육박람회를 시작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세 작품은 모두 교과 과정 안에서 핵심 개념을 게임 메커니즘으로 풀어냈지만, 그중에서도 [15℃]는 과학의 원리가 게임 메커니즘에 특히 잘 녹아 있는 작품이다. 온실효과와 지구온난화의 원리를 경험하는 협력 게임으로, 온실 기체가 열을 저장하여 지구 온도가 유지됨을 표현하기 위해 온실 기체 카드의 빈칸에 열 큐브를 올릴 때마다 지구 온도가 높아지는 메커니즘을 적용하였다. 수증기는 1개, 이산화탄소는 2개, 메테인은 4개까지 열 큐브를 저장하는데, 실제 분자당 열 저장량을 게임적으로 조정한 결과이다. 이로 인해 지구 온도를 낮추는 가장 좋은 방법은 메테인 등의 온실 기체 자체를 줄이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 지구 평균 온도인 15℃를 달성한 채 게임이 끝나면 함께 승리하는데, 지구의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목표 달성 확률을 의도적으로 낮추었다. 지구 온난화를 주제로 한 협력 게임이다 보니 기후 환경과 관련된 다양한 현장에서 활용을 문의해 오고 있다.
날씨 단원에서 쓸 수 있는 [응결게임]은 학생들이 가장 재미있어 하는 게임이다. 중학생들이 어려워하는 포화수증기량 곡선 그래프 위에서 서로 공격하고 받아치며 상대를 응결시키는 게임인데, 그래프 위에서 말을 옮기며 놀다 보면 자연히 응결의 원리를 이해하게 된다. 온도를 낮추고 수증기량을 높이는 카드는 공격 카드로, 온도를 높이고 수증기량을 낮추는 카드는 회복 카드로 쓰이는 식이다. 응결되면 얻는 물방울 토큰을 누구든 4개 모으면 게임이 끝나는데, 물방울 토큰이 가장 적은 1명만 승리한다. 역동적인 상호작용에서 오는 재미가 크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도 고려해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물방울 토큰을 많이 받을수록 카드를 더 많이 사용할 수 있는 규칙과, 1명 외에는 모두 패배하는 방식으로, 게임이 끝나는 순간까지 연합과 반전이 변화무쌍하게 일어나도록 유도하였다.
[케미술사]는 화학 반응식 게임으로 가르치기 어렵고 배우기 어려운 단원이었기에 게임화도 쉽지 않았다. 어려운 개념인 만큼 협력 게임으로 만들어 서로 알려줄 수 있게 하고, 화학 반응식의 기본적인 규칙을 담아야 했다. 화학 전공자인 한규선 선생님과 여러 번 갈아엎고 재구성한 끝에, 운과 용기를 시험하는 ‘push your luck’ 메커니즘을 도입하고 케미술사들이 드래곤을 사냥하기 위해 원소 큐브를 모아 화학 반응식 주문을 시전하는 테마를 입혀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반응물 부분의 원소 큐브를 다 모으면 큐브를 재배열하여 생성물 분자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마법이 시전된다. 질량 보존 법칙과 계수가 결정되는 원리를 메커니즘에 담아낼 수 있었다. 규칙이 쉽고 큐브를 뽑는 과정에 스릴과 재미가 커 출시일 파주에서 열린 보드게임 축제에서 어린이들의 반응이 가장 뜨거웠던 작품이기도 했다.
이 세 작품은 교사 연구회와 보드게임 지도사 교육과정 등을 통해 다양한 교육 현장에 확산되는 중에 있다.
보드게임으로 채우는 High Touch 미래 교육
지금 우리 학교 현장은 AI, 빅데이터, 스마트 기기 등 첨단 기술이 점령하고 있다. 하지만 집에서도, 길에서도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아이들의 시선을 수업 시간마저 태블릿 유리 화면을 향하게 해야 하는가? 나는 스마트 기기가 가득 찬 지금의 교실이야말로, 물성 매력과 대면 소통 촉진이 가장 큰 장점인 보드게임이 오히려 절실해진 시점이라고 확신한다. 한 번 더 서로의 눈을 바라보게 하고, 더 많은 표정을 짓게 하고, 더 생생한 목소리를 나눌 수 있도록, 보드게임은 도울 수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라는 격언을 좋아한다. 나는 미래의 과학 교실에는 스마트 기기들뿐만 아니라, 온갖 물성을 가진 아날로그 교구들과 함께, 각종 과학 수업용 보드게임들도 한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예측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 보드게임을 즐기고 싶다면, 함께 할 ‘사람’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내가 과학 보드게임 확산에 함께할 선생님들을 찾고 있듯이. 수업용 과학 보드게임 출판 프로젝트가 싹을 틔우게 된 이야기를 소개해 보았다. 마찬가지로 함께 즐기는 과학교육을 향해 나아가고 계시는 모든 선생님들의 도전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최원준 교사는 신성중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과학 개념을 녹여낸 보드게임을 개발하여 이를 실제 수업에 활용하는 방안을 활발히 연구하고 확산하려 애쓰고 있다. 교사들의 좋은 아이디어가 ‘완성된 교구’ 형태로 현장에 보급되어야만 교육 혁신이 확산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과학 수업용 보드게임 출판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