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학생을 위한 보편적 과학 수업1) : 장애학생을 위한 과학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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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다
누구나에게 평등한, ‘모든 이를 위한 과학’
필자는 20년째 대학에서 물리교사를 양성하고 있는 물리교육 연구자이자 과학교육자이다. 연구자로서 나의 중심 질문은 늘 ‘물리를 어떻게 가르칠까’였다. 그런데 어느 날 시각장애학생에게 빛을 가르쳐야하는 문제를 만나게 되었다. 앞을 볼 수 없는 학생에게는 물리를 어떻게 가르쳐야할까? 시각장애를 가진 학생에게 물리를 가르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래 내용은 나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따라가는 과정이다.
지적 성취 우선하던 과거 넘어 ‘모든 이를 위한 과학’으로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과학교육은 여러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스푸트니크 충격 이후 서구 사회는 지적 성취를 우선시 하는 과학교육 혁신기를 이끌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혁신적인’ 과학교육은 소수 엘리트 학생들에게만 도움이 되었고 다수 비이공계 학생들에게는 외면을 받았던 역사가 있다(DeBoer, 1991). 영국의 과학철학자 자이먼(J. Ziman) 교수는 ‘누구를 위한 과학교육인가’라고 반문하면서, 과학교육의 주요 대상이 잠재적 과학기술인력만이 아니라 모든 직업인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Ziman, 1980). 이 무렵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에서 ‘Project 2061’이라는 야심찬 장기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핼리혜성이 지구를 방문한 1985년도를 기념하여 시작되었으며, 공전주기가 76년인 핼리혜성이 다시 지구를 방문하는 2061년에는 프로젝트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다. 그토록 염원하는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바로 ‘모든 이를 위한 과학2)’이었다! 이 문구는 과학교육이 지향할 바가 과학자를 양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모든 시민을 위한 과학적 소양 함양이 되어야함을 나타낸다(AAAS, 1989).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나오는 동안 ‘모든 이를 위한 과학’은 세계 각국에서 과학교육의 목적을 나타내는 표현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국가 수준 교육과정에는 과학교육의 목적을 ‘모든’ 학생이 ‘민주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과학적 소양’을 함양하는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모든 이를 위한 과학교육’을 하고 있을까? 한국과학교육학회를 창립한 박승재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간의 과학교육을 되돌아보며 ‘교실의 1/3은 잃어버린 학생이 아닌가’라며 뼈아픈 반문을 제기하였다(박승재, 2006). ‘모든 이를 위한 과학’이라는 슬로건은 과학교육의 대상이 모든 학생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넘어서 과학교육이 모든 학생 누구에게나 평등해야할 것을 의미한다.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부터 과학교육 연구 문헌들에서는 성별, 인종, 문화, 경제, 언어 등 학생들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배경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학습자의 다양성(diversity)이 중요한 연구 주제로 부각되고 있다.
학술적인 관심이 학습자의 다양성으로 확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과학교육의 연구와 실천이 모든 이에게 평등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반성이 필요하다. 평등한 과학교육에 대해 관심과 실천이 적었을 수도 있고 이론적 논의가 아직 충분하지 않아서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모호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이를 테면, ‘모든(all)’에 대한 의미 정의가 불분명하여 종종 ‘다수(majority)’, ‘대중(public)’, ‘보통(norm)’ 등의 개념과 혼동되기도 한다(임성민과 마틴, 2014). 일부 학자들은 ‘모든 이를 위한 과학’이라는 표현을 보완하여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또는 ‘각자를 위한 과학(science for each)’이라는 표현을 제안하고도 있다. 미국의 교육학자 바튼(Barton)은 도심 빈곤 지역 등 소외 계층 학생들의 과학교육 정책과 관련하여 미국의 과학교육 정책을 비판하면서 ‘모든 이를 위한 과학’에 대한 개념을 재설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더불어 과학교육의 연구와 실천에 있어서 교사와 학생들의 삶과 관련된 사회·역사·정치·물리적 상황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요구하였다(Barton, 1989).
뜻밖의 도전, 용감한 시작 다양성 존중한 과학교육의 길 모색
우리나라에서도 장애학생3)과 같이 특별한 교육적 지원이 요구되는 학생에게도 의미있는 과학교육을 하기 위해 뜻을 모은 몇몇 연구자들이 ‘특수과학교육연구회’라는 연구 모임을 2005년에 시작하였다. 뜻은 있었으나 관련 연구문헌은 적었고, 이론적인 논의는 하였으나 실천 경험은 없었다. 특수교육 전공자들의 도움을 구한 결과,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교육에서 그나마 가능성을 찾았다. 이에 용기를 내어 2006년 가을에 한국과학교육학회 특별학술대회의 일환으로서 ‘시각장애학생을 위한 과학싹잔치’라는 교육 행사를 열기로 하였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앞을 볼 수 없는 학생에게 과학을 가르칠 수 있을까? 가르칠 수 있다면 어떻게 가르쳐야할까?
‘어떻게 가르칠까’보다 ‘누구를 가르치나’
장애학생 위한 과학 교수학습의 접근 방법
과학연극을 기획하면서 장애학생을 위한 과학교육이란 무엇일까를 새삼 돌아보았다. 물리를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나는 늘 ‘어떻게 가르칠까’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장애학생에게 물리를 가르치고자했던 십 수 년의 경험을 돌아보니 질문의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중요하면서 첫 번째로 물어야할 질문은 ‘누구를 가르치는가’였다. 내가 준비한 교구와 실험을 이 학생은 수행할 수 있을까? 학생이 이 실험을 수행하게 하려면 어떻게 교구와 방법을 바꾸어야할까?
내가 하는 설명과 표현을 학생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학생에게 가장 필요한 과학 학습 내용은 무엇일까? 장애학생에게 과학을 가르치고자 할 때 생기는 모든 질문은 학생에 대한 이해 없이는 답을 얻을 수 없다. 학생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비로소 이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칠 지와 어떻게 가르칠 지가 결정된다. 과학을 가르치고 배움에 있어서 장애학생은 누구인가? 내가 장애학생을 대할 때 아마도 처음 가졌던 장애인에 대한 이해는 (1) 신체적·정신적으로 손상을 입었고(impaired), (2) 그 손상으로 인해 무능하고(disabled), (3) 따라서 그들의 부족한 부분(handicapped)을 보완해 주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애학생과 함께 과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과 경험이 누적되며 깨닫게 되는 사실은 (1) 이들이 가진 신체적·정신적 손상은 우리 모두가 저마다 가진 다양성의 일부이고, (2) 손상 입은 특정 영역을 제외하고는 이들도 유능하며(abled), (3) 따라서 장애학생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장애인과 더불어(inclusive) 모든 활동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임성민과 김성애, 2009).
장애학생은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장애학생이 과학을 공부할 때 만나는 가장 큰 장애물(obstacle)은 그들이 가진 장애(disability)가 아니라 본인과 주변의 낮은 기대감이다(Hassard & Dias, 2009). 많은 경우, 낮은 기대감이 장애학생의 과학 학습 기회를 원천 차단한다. 내가 아는 한 과학 공부의 본질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손과 머리가 의미 있게 어우러지는 활동으로서 과학 탐구’에 참여하는 것이다. 장애학생들은 비장애학생과 똑같이 그러한 과학 탐구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McGinnis & Stefanich, 2007). 장애학생과 과학 탐구 활동을 하다보면 학생들이 보이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장애학생들이 과학 탐구활동에 참여할 때 겪는 어려움의 근원은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경험의 부재이다. 장애학생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비장애학생들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필자가 내린 장애학생을 위한 과학 교수학습의 접근 방법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임성민, 2010). 첫째, 어떤 장애를 가진 학생이라도 과학 학습에 배제하지 않고 모두 참여시킨다. 둘째,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한 과학 탐구 활동에 참여시킨다. 셋째, 장애학생들이 직접 참여하여 스스로 경험하게 한다. 결국, 장애학생을 위한 과학교육은 장애학생만을 위한 특별한 수업이 아니라 장애학생도 참여할 수 있는 보편적 수업이다. 장애학생을 잘 가르치기 위한 고민과 노력은 결국 모든 학생 개개인을 잘 가르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임성민 외, 2018). 예를 들어, 시각장애학생을 위해 고안한 감광기와 모형을 활용한 수업은 비장애학생이나 영재학생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 역은 어렵다. 결론은 단순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이토록 단순한 걸 왜 우리는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우수한 인재 위한 교육 아닌
‘특별한 소수’ 포함한 ‘모든 이를 위한 과학’
2022년 10월 6일 오전, 대구보건학교(대구시에 위치한 중도중복·지체장애 특수학교) 강당 가득 휠체어를 탄 학생 100여 명이 모여 있다. 학생들은 과학마술쇼에 이어 과학연극을 관람하고 있다. 외부 자극에 민감하여 정적인 것이 특징인 중도중복 지체장애 학생들이지만 이날은 놀라우리만큼 ‘리액션’이 좋다. 당일 오후에는 8개 학급을 순회하면서 10종의 과학체험활동을 하고, 그 사이 강당에서는 마이크로중력체험과 로봇자동차 조정 등 놀이마당이 열렸다. 이날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한 인원은 사범대학 예비교사 100여 명과 노원천문우주과학관과 국립청소년우주센터의 연구원 10여 명이다. 100여 명의 학생들의 하루 행사를 위해 100여 명의 교사들이 100일을 넘게 준비했다. 2006년에 시작한 이래 이렇게 17년을 지속해 왔다. 코로나 19사태로 대면 집합행사를 할 수 없고 외부의 지원이 끊어진 2020년과 2021년에도 기어이 실시간 온라인 행사로 이어왔다.
우리가 들인 이와 같은 노력은 어떤 효용이 있을까? 우리의 하루 행사를 통해 이 학생들을 우수한 과학자 또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을까? 아무리 셈을 굴려 봐도 수지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투자 대비 효과로 따지면 매우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교육의 성과를 효용성으로 따진다면 애초에 장애학생을 위한 과학교육은 불가능하다. 아니, 교실에서 학업 성취가 부족한 학생을 위한 교육도 없고 오직 우수한 인재만을 위한 교육만 남아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육의 목적이 우수한 인재 양성이었던가? 3년 만에 대면 행사로 재개된 올해 희망의 과학싹잔치에서 휠체어에 탄 학생과 눈을 맞추고 손을 잡으며 실험을 하는 동안,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존중과 이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리곤 ‘Project 2061’이 제기한 과학교육의 목적, ‘모든 이를 위한 과학’을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모든 이’는 ‘특별한 소수’를 포함한다.
국가 사회가 특별한 소수인 과학 영재교육에 노력을 들인다면, 누군가는 또 다른 ‘특별한 소수’인 장애학생 과학교육에도 노력과 자원을 들여야 한다. 영재이든 장애학생이든 ‘모든 이’로서 이들은 인간으로서 고유한 존엄을 가진 인격체이다. 교사로서 이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했다면 어쩌면 교육의 성과를 당장의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했거나, 또는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썩 좋은 핑계는 아닌 것 같다. 핼리혜성이 다시 지구를 방문하는 2061년, 이 웅장한 목적이 얼마나 성취되었는지 되돌아볼 날을 상상해 본다.
임성민 교수
임성민 교수는 물리를 잘 배우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과학교육학 공부를 시작했고, 물리학습과 인지적 신념의 관계를 탐색하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대구대학교 물리교육과에 재직하면서 물리탐구실험교육, 현대물리교육, 물리교사교육 등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사회문화적 소수학생을 위한 과학교육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실천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